이북식 김치의 슴슴한 매력: 젓갈 대신 생선이 들어가는 발효 과학

얼마 전 주말에 가족들이랑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는데, 밍밍하지만 돌아서면 생각나는 그 맛이 참 묘하더라고요. 그때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게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냉면에 곁들여 나오는 하얗고 맑은 ‘이북식 김치’였습니다.”

남쪽 지방의 김치가 혀를 때리는 강렬한 매운맛과 쿰쿰한 젓갈 냄새로 입맛을 돋운다면, 함경도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이북식 김치는 고춧가루가 들어갔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색이 연하고, 맛 또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슴슴’합니다. 하지만 이 슴슴함 속에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며 단백질을 천천히 분해해 낸 북한 지역 특유의 경이로운 발효 과학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은 젓갈 대신 ‘명태’와 ‘가자미’를 통째로 썰어 넣는 이북식 김치의 맑고 시원한 감칠맛의 비밀이 무엇인지 분석해 보겠습니다.

1. 혹한의 천연 냉장고: 소금과 고춧가루를 아끼는 ‘저염 발효’


이북식 김치의 가장 큰 특징인 ‘슴슴한 맛’은 한반도 북부의 혹독한 겨울 기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남부 지방은 날씨가 따뜻해 김치가 쉽게 상하기 때문에 소금을 왕창 뿌리고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부패균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함경도나 평안도의 겨울은 그야말로 ‘천연 냉동고’입니다. 기온이 너무 낮아 김치를 상온에 두어도 부패를 일으키는 잡균들이 아예 활동하지 못합니다. 부패할 염려가 없으니 당연히 소금을 많이 칠 필요가 없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고춧가루나 마늘도 최소한으로만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염도를 뚝 떨어뜨린 ‘저염 환경’은 저온에서 서서히 활동하는 특정 젖산균(류코노스톡 등)이 자라기에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줍니다. 이 젖산균들은 톡 쏘는 이산화탄소와 상큼한 젖산을 뿜어내어, 텁텁함 없이 가슴 속까지 뻥 뚫리는 시원하고 청량한 김치 맛을 완성합니다.

2. 젓갈 대신 생선을 통째로: 명태와 가자미의 단백질 분해 마법


이북식 김치의 가장 독특하고 과학적인 비법은 바로 양념에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멸치나 새우를 푹 삭힌 ‘젓갈’을 사용하지만, 이북 지역, 특히 바다와 맞닿은 함경도에서는 젓갈 대신 갓 잡은 싱싱한 ‘생태(명태)’, ‘가자미’, 심지어 ‘오징어’를 뭉텅뭉텅 썰어서 배추 사이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습니다.

왜 젓갈을 쓰지 않았을까요? 젓갈이 만들어지려면 어느 정도 따뜻한 온도가 유지되어 미생물이 생선을 삭혀야 하는데, 이북은 너무 추워서 젓갈이 제대로 발효되지 않고 얼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대신, 김칫독 안에 생선을 썰어 넣고 땅속 깊이 묻어두면, 기나긴 겨울 동안 배추가 익어가면서 생선 살에 포함된 자체 효소들이 아주 서서히 단백질을 분해하기 시작합니다. 젓갈 특유의 구리고 비린 냄새는 전혀 나지 않으면서, 생선 살이 쫀득하게 익어가며 아주 고급스럽고 깔끔한 아미노산(감칠맛)을 국물에 스며들게 하는 완벽한 저온 숙성 기술입니다.

3. 국물의 미학: 수분 활성도와 탄산 미의 극대화


이북식 김치를 먹어보면 배추김치인데도 마치 동치미나 나박김치처럼 맑은 국물이 찰랑찰랑할 정도로 아주 넉넉하게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넉넉한 국물 역시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추운 지방에서는 몸을 녹이기 위해 뜨거운 고기 육수를 마시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따뜻한 방안(온돌)에서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고 톡 쏘는 동치미 국물을 마시며 속을 풀어주는 식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국물을 넉넉하게 잡고 저온에서 길게 발효시키면, 국물 속에 이산화탄소(탄산 가스)가 듬뿍 녹아들어 마치 탄산수를 마시는 듯한 엄청난 청량감을 줍니다. 무채와 배, 사과 등을 큼직하게 썰어 넣어 배추와 과일에서 우러나온 천연의 달콤한 수분이 국물과 어우러져, 조미료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맑고 우아한 단맛을 만들어냅니다.

4. 고춧가루 물들이기: 텁텁함을 없애는 시각적 미니멀리즘


김치를 버무리는 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납니다. 양념을 치덕치덕 바르는 전라도와 달리, 이북식 김치는 고춧가루를 맹물이나 육수에 미리 풀어둔 뒤, 그 맑은 웃물만 떠서 김칫국물로 사용하거나 고춧가루를 아주 소량만 흩뿌립니다.

고춧가루의 입자가 배추에 직접 덕지덕지 묻어 있으면 텁텁한 맛이 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북식처럼 맑은 고춧가루 물만 들이면, 시각적으로는 아주 은은하고 먹음직스러운 분홍빛을 띠면서도 입에 들어갔을 때 고춧가루 가루가 씹히지 않아 식감이 대단히 깔끔해집니다. 최소한의 양념만으로 배추 본연의 고소한 단맛과 아삭함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는, 이른바 ‘발효 미니멀리즘’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화려하지 않아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맛의 철학


맵고, 짜고, 단맛이 넘쳐나는 현대의 자극적인 식단 속에서 이북식 김치의 ‘슴슴함’은 처음엔 다소 심심하고 매력 없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젓갈 대신 맑은 생선 살이 만들어낸 우아한 감칠맛, 혹독한 추위가 선물한 청량한 젖산균의 톡 쏘는 국물 맛을 한번 제대로 경험하고 나면, 그 어떤 화려한 김치보다 진하고 긴 여운을 남깁니다.

가장 차가운 땅에서, 가장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통해 단백질과 젖산균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북식 김치. 평양냉면의 국물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들이켜게 만드는 그 슴슴하고 시원한 중독성의 뒷면에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최상의 맛을 끌어낸 북한 지역 선조들의 놀라운 생존 과학이 숨 쉬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자극적인 양념을 모두 내려놓고, 가자미 한 마리를 툭 썰어 넣은 맑은 이북식 김치의 깊은 매력에 꼭 한번 빠져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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